‘수리 문화’가 사라지고 ‘버리는 문화’로 바뀐 사회상
오늘은 사라져 가는 직업 중 고장난 TV 라디오를 고치던 장인들에 대해 소개해 드릴 예정입니다.
골목마다 있던 작은 전파사, 생활 속의 기술자
지금은 전자제품이 고장 나면 대부분 서비스센터를 찾거나, 아예 새 제품을 사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집니다. 하지만 1970~1990년대까지만 해도 동네 곳곳에는 ‘전파사(電波社)’라고 불리는 작은 가게가 있었습니다. 전파사는 고장 난 텔레비전, 라디오, 선풍기, 전축 같은 전자기기를 수리해주던 가게로, 흔히 말하는 ‘전자제품 만능 수리점’이었습니다.
전파사의 간판은 대체로 붉은색과 파란색 네온사인으로 장식되어 있었고, 작은 점포 안에는 낡은 부품과 납땜 기계, 뒤엉킨 전선들이 빼곡히 들어서 있었습니다. 주인장은 흰색 가운을 입고 안경을 쓴 경우가 많았는데, 손에는 항상 드라이버나 납땜 인두가 들려 있었습니다. 마치 동네의 작은 ‘닥터’ 같은 존재였죠.
당시에는 TV나 라디오 같은 전자제품이 귀했고 가격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지금처럼 대량생산과 해외 수입이 활발하지 않았기 때문에, 한번 구입하면 오래오래 쓰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따라서 고장이 나면 버리는 대신, 전파사를 찾아가 수리를 맡기는 것이 자연스러운 문화였습니다. 전파사 주인은 작은 나사를 돌리고, 회로를 납땜하며, 부품을 교체하면서 망가진 기기를 다시 살려냈습니다. 고쳐진 기기를 들고 집으로 돌아가던 순간의 기쁨은, 새 제품을 사는 기쁨 못지않았습니다.
이렇듯 전파사는 단순한 수리점이 아니라, 당시 가정의 ‘생활 필수 파트너’였습니다. 저녁 시간대 TV가 고장 나면 온 가족의 일상이 멈추었기에, 전파사 주인은 곧장 불려나가 집에서 수리를 하기도 했습니다. ‘수리 기사 아저씨’는 어린이들에게도 친근한 존재였고, 동네 어른들에게는 없어서는 안 될 장인이었습니다.
납땜 냄새와 전선 뭉치 속의 삶, 전파사 장인들의 이야기
전파사의 내부는 늘 독특한 풍경을 자아냈습니다. 좁은 공간에 크고 작은 전자기기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고, 공기 중에는 납땜 냄새와 기름 냄새가 가득했습니다. 전파사 주인들은 긴 시간 동안 앉아 회로를 분석하며, 작은 부품 하나하나를 손으로 다루었습니다.
수리 과정은 단순하지 않았습니다. 지금처럼 정품 부품이 쉽게 구해지는 시대가 아니었기 때문에, 때로는 다른 기기의 부품을 떼어내 재활용하기도 했습니다. 주인은 망가진 트랜지스터 라디오를 열어 낡은 저항을 교체하거나, 텔레비전 브라운관의 접촉 불량을 손보면서 기기를 살려냈습니다. 고쳐진 제품에서 다시 불빛이 들어오거나, 소리가 흘러나올 때의 성취감은 대단했습니다. 그 모습은 마치 작은 마법과도 같았죠.
전파사는 단순히 물건을 고치는 공간이 아니라, 동네 소통의 장이기도 했습니다. 수리를 맡긴 주민들은 가게 앞에서 기다리며 이웃들과 이야기를 나누었고, 주인은 단골 손님들과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나누곤 했습니다. 아이들은 전파사 앞에 모여 부품과 전선을 신기하게 구경하며 ‘기술자의 꿈’을 키우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전파사의 삶은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고장 난 제품이 다양하다 보니 모든 기기의 구조와 회로를 이해해야 했고, 손재주와 기술력뿐 아니라 끊임없는 학습이 필요했습니다. 수리 과정에서 전기 충격을 받는 위험도 있었고, 하루 종일 눈을 부릅뜨고 작은 부품을 다루다 보니 시력이 나빠지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파사 장인들은 묵묵히 자신의 일을 해냈습니다. 그들의 손끝에서 수많은 가정의 웃음과 일상이 되살아났기 때문입니다.
‘수리 문화’에서 ‘버리는 문화’로, 변화의 이면
전파사의 시대는 1990년대 후반부터 서서히 저물기 시작했습니다. 첫째 이유는 전자제품의 대량생산과 가격 하락이었습니다. 과거에는 TV 한 대가 집안의 큰 자산이었지만, 점점 전자제품이 값싸고 쉽게 구할 수 있는 소비재로 변했습니다. 고장 나면 수리비가 더 들거나, 새 제품을 사는 것이 오히려 경제적이라는 인식이 퍼졌습니다.
둘째 이유는 제품의 구조 변화였습니다. 옛날 기기는 비교적 단순한 아날로그 회로로 되어 있어 납땜과 부품 교체로 수리가 가능했습니다. 그러나 현대 전자제품은 대부분 디지털화되고, 부품이 집적회로(IC)나 모듈 단위로 제작되어 개인이 손댈 수 없게 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스마트폰이 고장 나면 부품 하나를 갈아 끼우는 것이 아니라 전체 모듈을 교체해야 하며, 이는 전파사 수준에서는 불가능한 작업입니다.
셋째 이유는 ‘AS 서비스센터’의 확대였습니다. 대기업들이 자체적으로 서비스센터를 운영하며 부품을 독점 공급하다 보니, 동네 전파사는 경쟁력을 잃었습니다. 결국 동네마다 있던 전파사 간판은 하나둘 사라지고, 지금은 도시 외곽이나 오래된 상권에만 일부 남아 있을 뿐입니다.
이 변화는 단순히 직업 하나의 소멸을 넘어, 사회적 문화의 전환을 상징합니다. 과거에는 고장 난 물건을 고쳐 쓰는 ‘수리 문화’가 당연했지만, 이제는 고장 나면 버리고 새것을 사는 ‘소비 문화’가 자리 잡았습니다. 편리함과 경제성을 얻은 대신, 우리는 물건에 대한 애착과 지속성을 잃어버린 셈입니다.
흥미로운 점은, 최근 환경 문제와 ‘지속 가능한 소비’가 화두가 되면서 다시금 ‘수리의 가치’가 재조명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유럽에서는 ‘수리권(Repair Right)’을 보장하는 법안이 추진되고 있으며, 국내에서도 전자제품을 고쳐 쓰려는 움직임이 소규모로 확산되고 있습니다. 어쩌면 전파사가 남긴 정신은 단순한 향수가 아니라, 미래의 환경을 위한 중요한 힌트일지도 모릅니다.
전파사는 단순히 물건을 고치는 가게가 아니라, 한 시대의 생활상과 문화를 담고 있던 공간이었습니다. 전파사 주인들의 손끝에서 불이 켜지고 소리가 흘러나오던 순간은 단순한 수리를 넘어, 사람들의 일상과 행복을 되살리는 일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버리고 새로 사는 것’에 익숙해졌지만, 그 속에서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 되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수리의 과정 속에는 물건에 대한 애착, 장인의 땀, 그리고 지속 가능한 삶의 가치가 녹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전파사의 추억은 사라진 직업을 넘어서, 우리가 앞으로 어떤 소비 문화를 만들어가야 하는지에 대한 중요한 질문을 던져줍니다.